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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마을에 머문 두 작가 이야기 : 김금희 작가 편


10년 전 여행의 잔상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던 곳. 그 기억을 따라 김금희 작가는 독일마을 레지던시 ‘작가의 방’에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그 때 품었던 기억을 따라 다시 남해로 옮긴 발걸음. 쉼을 꿈꾸며 찾은 곳이었지만, 남해가 주는 낯설고 신선한 에너지는 오히려 작가를 바깥으로 이끌었죠. 시장에 들러 멸치를 사고, 마음을 끄는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낯선 골목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작은 카페에 앉아 조용히 문장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김금희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곳 남해의, 정겹고 다정한 이름들이었습니다. ‘섬호’, ‘지족’, ‘미조’…  화려하거나 세련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 말들이 전하는 온도와 결이 작가의 감정을 흔들었습니다.




또 하나, 남해가 선물한 풍경들. 물가에 걸터앉아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마음을 비우기도 했고, 해수욕장에 늘어선 파라솔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여름을 조용히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한 편의 에세이는 남해에서 작가가 머문 계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게 해줍니다.



<파라솔을 펴는 사람> 


김금희 


 남해로 떠나는 날 무척이나 피곤한 상태였다. 과장하자면 거의 눈을 감은 채로 비행기를 탔고 이륙도 하기 전에 잠이 들었다. 사천공항에 비행기가 쿵 하고 착륙하자 혼자 놀라 “꺄” 하고 소리 질렀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승객은 나밖에 없었다. 십년 전쯤 온전히 운전으로 왔을 때보다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왜 진작 사천공항 이용을 떠올리지 못한 걸까 싶었다. 


렌터카를 인수하고 달리기 시작하자 금세 한려수도가 펼쳐졌다. 크고 작은 섬들이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남해.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널 때쯤 나는 내가 남쪽으로 완전히 내려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남쪽은 따뜻하고 남쪽은 너른 햇살을 가지며 고요하다. 내모는 바다가 아니라 받아안는 바다, 위력을 펼쳐보이기보다는 더더 넓어지며 풍요롭게 하는 바다. 

드디어 삼동면 독일 마을에 도착해 한주 동안 머물 호수 위의 집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 안내대로 따라갔더니 길이 끊기고 “회차로 없음”이라는 간판이 진입을 막아서 당황했다.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 <대온실 수리 보고서>(창비)


 지난해 출간한 소설에서 이렇게 당당히 써놓은 나는 회차로 없는 길도 있다는 건 생각 못했네 싶었다. 길가에 서서 고민하다가 펜션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1970년 간호사로 독일로 건너가 사랑하는 남편과 가정을 이룬 사장님은 고국으로 돌아와 남은 삶을 일구고 계신 분이었다. 근처까지 왔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펜션 바로 앞까지 들어와 차를 주차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저 그런데 회차로 없음이라고 써있어서요.”

“아, 그건 그냥 무시하고 들어오면 돼요.”

 회차로가 없다고 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멈춰서 걱정부터 하는 사람. 남해에 막 도착한 나는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아주 다양한 내 모습이 자리하는데 바쁜 일정에 쫓기다보면 마음이 가팔라지고 어떤 ‘여지’도 유연성도 없는 더 없이 딱딱한 인간이 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을 풀어주자면 공간을 바꾸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을 텐데 그동안 여행다운 여행을 다니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원래 나는 책을 한권 내고 나면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떠나 적어도 사나흘쯤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에는 여행이 여의치 않아서 이후에는 남극까지 취재를 하고 돌아오느라, 그 뒤에는 갑자기 큰병을 앓게 된 아빠 간병을 하고(아빠는 완쾌하셨다) 연이어 책들을 내느라 그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자 이 여행이 조금 특별해졌다. 펜션은 독일 전통주택의 특징이 잘 남아 있었다. 붉은 벽돌 지붕, 회반죽과 흰벽돌로 채워올린 벽면 그리고 작은 격자형 창문들을 곳곳에 달아 채광율을 높인 형태였다. 사장님 안내로 들어간 집안은 아주 오래전 내가 살았던 단독주택처럼 나무바닥으로 되어 있었고 계단도 그랬다. 붉은 꽃무늬 소파와 깨끗한 욕실, 연식이 좀 돼보이는 에어컨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오래되었지만 깔끔하게 관리되어온 것들의 기품이 느껴지고 아늑했다. 침실에서는 약간 비탈진 길에 비스듬히 서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보였다. 시선을 멀리 주면 두 방파제가 애틋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물건방조제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수풀들이 무성하게 둘러싼 물길도. 

“저것이 레이크(lake)인가요?” 

펜션 이름을 의식해 내가 묻자 독일에서 아내의 조국으로 온 울머(Umer) 씨는 “호수”라는 정확한 한국말로 알려주었다. 이내 프로젝트 담당자가 펜션을 방문해 우리는 면담을 시작했다. 

“저 근데 거의 실내에서 잠만 자다가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일단 나는 그렇게 실토했다. 남해에서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예정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머리부터 천천히 그간의 긴장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녁은 소시지로 실컨 배를 채우고 잠이 들었다. 인기척이 들리는 아래층 덕분에 잠이 더 포근했다. 

 하지만 나는 놀랍게도 하루도 실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눈을 뜬 나는 아침식사도 해결하고 작업도 할 수 있는 카페를 검색했고 남해읍까지 차를 몰고 갔다. 그리고 평소처럼 소설을 썼다. 카페는 관공서 근처에 있어서 동료들끼리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남해읍 공무원분들이 들락거렸다. 직장 생활의 애환과 푸념이 들릴 때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귀가 열렸다.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공영 주차장 라인에 정확히 세웠는데 싶어 이유를 묻자 가게에 물건이 들어와야 한다고 부탁했다. 위치를 잘 기억하려고 일부러 다이소 앞에 세웠는데 그 조심스러움이 문제였다. 차를 빼러 나가자마자 미안하다는 사과를 들었고 나도 “죄송해요”라고 답했다. 내 차로 가로막혀 직원들이 차에서 가게까지 직접 물건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온종일 남해인들의 일상 속을 드나들었다. 어느 서점에서는 사장님과 한시간 가까이 대화하기도 했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는 너무 아름다워서 혼자만 알기 아까울 정도였다. 남해에서 50년간 작은 사진관을 운영했던 할아버지와,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남해 한달 살기를 하러 온 94년생 프랑스 젊은이가 함께 열었다는 사진 전시회 이야기였다. 그전부터 서점 사장님이 전시회를 권유해도 “나는 예술 사진 찍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며 거절했던 할아버지는 어리고 열정적인 사진작가와 함께였을 때는 용기를 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찍은 사진 속에는 남해 사람들과 이곳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행주대교가 무너졌던 해에 이곳에도 창선교가 붕괴되어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서울에서의 참사에 비해 남해의 비극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카메라는 사고의 순간부터 이후 창선교가 복원되던 모습까지 모두 담고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이 느꼈을 슬픔과 그것을 딛고 일상을 되찾기 위한 소망과 노력, 이후 다시 살아감의 나날까지. 전시회 다음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진관은 마치 잠깐 주인이 외출한 가게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쇼윈도에는 사진 몇 점과 함께 직접 썼던 카메라도 남아 있었다.

“너무 좋은 작품이네요!”

지족구 거리의 오래전 풍경을 담은 흑백사진 앞에서 나는 소리 쳤다. 아직 아스팔트로 포장하기도 전의 신작로. 포대기로 아이를 업은 한 엄마가 환하게 웃고 그런 그녀를 친구 혹은 자매인 듯 보이는 사람이 장난스레 껴안고 있었다. 사진의 그곳이 지금의 이 거리라고 했다. 와, 하는 탄성이 나올 만큼 삶의 천진한 기운을 품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속에 삶의 예술적 포착이 빛나고 있었다. 

 매일매일 경차를 몰고 열시간 이상 돌아다녔던 남해는 물만큼이나 나무가 풍요로운 곳이었다. 심지어 나무기둥과 대나무그물로 멸치를 잡는 곳이니 왜 그렇지 않을까. 금송리를 지나다 죽방렴 관람대를 만나 걸어가보았다. 나무데크는 죽방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말뚝으로 세운 나무들이 막대기 정도로 상상됐는데 막상 가보니 제법 버젓한 나무들이었다. 그리고 그 짠 바닷물을 빨아들인 나무말뚝에서 놀랍게도 잎들이 푸릇하게 펴있었다.

회차를 위해 잠시 들른 마을에서조차 나무들은 그 자리를 황홀하게 지키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서있는 나무들의 둥치는 넓고 넓어서 마치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힘찬 나뭇가지와 흔들리는 잎들을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찬란한 아름다움이란 늘 이렇게 나무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 아래에서는 얼마든지 깊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남해에서 나는 여러 멋진 단어들의 조합도 배웠다. 등장인물 이름을 쓸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어감에 골몰하는데 마치 보물을 줍는 것처럼 자주 그런 말들을 만났다. 물살이 빨라 멸치잡이가 잘되고 지금은 젊은 사장님들이 자기만의 가게들을 듬직하게 이어가고 있는 지족리의 지족, 마을이름인 섬호, 초음, 미조. 바다의 푸른빛과 나무들의 푸른빛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묘하게 차갑고 따뜻한 온도의 말. 언젠가 꼭 소설에 쓰고 싶은 이름들이었다. 예정된 북토크가 끝나고 일주일 동안 모든 남해 해수욕장을 여행했다는 독자를 만났다. 내게는 단 하루가 남았을 뿐이라서 어느 해수욕장이 가장 좋았느냐고 물었다. 

“모든 해수욕장이 다 좋았어요” 

하기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그래도 한곳을 추천해주었다. 

“상주은모래 해수욕장이요.” 

 마지막날, 비가 예보되어 있었지만 새벽같이 눈을 뜬 나는 남해군 종량제 봉투에 대강 짐을 챙겨넣은 다음 상주면으로 달렸다. 내가 지내는 독일마을이 남해군 초입에 있다면 상주면은 거의 끝지점이었다. 다행히 달리는 동안 하늘은 점점 맑아졌고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환하게 개어 있었다. 나는 울창한 소나무숲을 지나 보드라운 모래를 밟고 바다로 들어갔다. 정강이까지만 들어갔는데도 파도가 칠 때는 물방물이 허리까지 튀었고 소리까지 질러가며 나름 물놀이의 스릴을 즐겼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해수욕장에는 서너 명뿐이었고 마을주민 두 분도 구명조끼와 파라솔 대여점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여용으로 갖다놓은 빨갛고 노란 튜브들이 오늘의 활약을 기대하며 짱짱하게 매여 있었다. 그때 문득 파라솔을 빌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해변 파라솔 아래 있었던 건 아주 어렸을 때뿐이었다. 당연히 내가 직접 빌린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마련해 나를 앉힌 것이었다. 

“지금 파라솔 대여 되나요?”

나는 모래를 퍼내고 있는 주민분께 가서 물었다. 

“되죠. 어데를 원하시는데요?” 

“좋은 곳이요.”

그 말 어디가 그랬는지 주민분이 “좋은 곳이요?” 되묻고는 웃었다. 

 그렇게 해서 상주은모래 해수욕장에 파라솔 하나가 펼쳐졌다. 그건 그날 상주은모래 해수욕장의 ‘마수걸이’ 파라솔이었고 내 인생 최초로 마련한 바캉스 파라솔이었다. 붉은 꽃무늬 파라솔 아래 분홍색 종량제 봉투를 놓고 누웠다. 천막 재질의 돗자리를 고정할 것이라고는 운동화밖에 없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돗자리는 부풀어올라 내게 모래를 뿌려 댔다. 서풍이 불 때마다 뭔가 꼬릿꼬릿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멀지 않은 자리에 오징어인지 한치인지 모를 것이 해안으로 떠밀려와 햇볕에 썩으며 벌레들의 양분이 되어주고 있었다. 자리를 옮길까 하다가 그냥 누워 있었다. 
나는 이미 파라솔을 편 사람이니까. 마치 나무처럼 파라솔을 좍 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불편들은 아주 사소한 것이 되고 결코 좁다고 할 수 없는 파라솔 그늘만큼의 평화가 주어진다. 나는 잠깐 몽롱하게 잠이 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거의 흰빛에 가까울 만큼 투명한 바다로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자 방문객들이 늘어났다.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은 하나같이 바다로 데리고 들어가 뭔가를 열심히 알려주고 싶어했다. 한 살이 되었을까 싶을 아기는 바다로 들어오지 않고 모래밭에 앉아 있었는데 바닷물을 느껴보게 하려고 엄마는 두 손으로 바닷물을 떠서 여러 번 다리에 부어주었다. 그 사랑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일흔은 되었을 듯한 어르신 여러 명이 웃통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고 그중 한 친구에게 수영을 가르치겠다며 열심이셨다. 우리는 왜 바다에 서면 바다를 알려주고 싶어할까. 얼마나 넓은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데도. 나는 그것이 자기 마음 깊은 곳을 보여주고 싶은 소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해만큼 편안하고 뭉근해진 마음으로 나는 눈앞의 풍경들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그 순간 다른 이들의 기억에도 내가 그런 모습으로 남을지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여기에 바다가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알려주기 위해 집을 떠나와 마침내 파라솔을 편 사람으로.

<끝>

*사진 제공 : 김금희 작가